논리적으로 가능한 것은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어떤 것이든 꿈꿀 수 있고, 정말로 어떤 것이든 꿈꾸어 왔다…고 말할 때의 꿈은 눈을 감았을 때에 보이는 심상들 일반을 환유하고 있지, 잠을 잘 때 보여 오는 꿈에 대해서는 오로지 가능성만을 지시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현실의 문제는 대개 이러한 제한 ― 심상 일반에서 잠잘 때 꾸는 꿈으로의 제한과 같은 ― 에서 벌어진다. 이러한 맥락에서 현실의 가장 난해한 문제는 서순을 바꾸면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에 있겠다. 말하자면, 그러한 서순 문제는 간단히 시간의 차원을 하나 추가한 우주를 상상하고 있는 우리의 심상 속에서는 일어날 수 없다 (아니면 풀지 못하는 매듭이 존재한다는 문제거나; 이 둘이 같다는 것은 최근에야 알았다). 하고 싶은 말은, 아무리 논리적으로 가능하다 한들, 그것이 언제나 구체적 표지를 가지고 눈 앞에 출현하지는 않음이다. 동시에, 잠을 잘 때 꾸는 꿈은 충분히 구체적임이다 (꿈과 현실을 어느 정도로 헷갈릴 수 있는지는 R. Descartes(1641)를 참조하라).
이제 꾸고 싶은 꿈의 의미가 명료해졌다. 그러한 꿈의 내용은, 물리적 현상을 통해서는 도저히 발생할 길이 없음에도 그것의 구체적 형상을 생생하게 목격하고 싶은, 차라리, 목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들이다. 이것이 자연스럽게 시각 예술의 부분이 됨은 주목할 만하다. 한편, 오타쿠의 범위를 유메죠시(夢女子)로 한정하지 않으면서도 나는 여전히 적을 수 있는 바, 오타쿠에게는 적어도 하나의 꾸고 싶은 꿈이 있다는 사실이 있다. 이 사실은 모든 오타쿠를 넓은 의미에서 2차 창작자로 포착할 수 있음에서 따라 나온다. 여기에서 꾸고 싶은 꿈은 현실의 2차 창작인 시각 예술이다.
그러나 꾸고 싶은 꿈을 가진 오타쿠를 예술가 일반으로 유비하는 일은 오히려 사태를 은폐한다. 그러한 유비는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매장이다: 꾸고 싶은 꿈의 애도적 속성을 가리는. 요는, 꾸고 싶은 꿈은 애도 상태의 자연스러운 확장이라는 일면을 가지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애도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에겐 꾸고 싶은 꿈이 있고, 꾸고 싶은 꿈이 있는 이에겐 ― “죽은 사람이 (…) 내 안에 계속 살아있게” 되는 ― “실패한” 애도의 애달픔이 있다. 그런 만큼, 오타쿠는 예술가로 유비되는 것 이상으로, 또한 애도하는 사람이 되어 왔다.
꾸고 싶은 꿈을 꿈, 혹은 꾸고 싶은 꿈의 바깥으로 나옴은 그러므로 낭만의 실현이면서 가장 개인적인 2차 창작 행위임과 동시에, 애도의 “성공”이다. 그러나 그러한 나옴은, 실제로는 아무것도 아니다. 꾸고 싶은 꿈은 이중의 꿈이기 때문이다. 꾸고 싶은 꿈이 있음은 꿈이 있음과는 다르다. 꿈이 있음의 꿈은 현실을 향해 있다. 이러저러한 일이 정말로 일어났으면 하는, 그러한 꿈이다. 반면 꾸고 싶은 꿈이 있음은, 꿈을 꿈 자체가 다시 하나의 꿈이 된, 꿈의 실현이 꿈꾸는 이의 의지나 행위와는 무관한 우연이 된 현상이다. 그 이중의 꿈이 이루어진들 그것은 꿈꾸는 자의 부단한 노력에 의한 결과가 아니어서, 마치 세계에 어떠한 변화도 가해지지 않은 채 꿈이 실현된 듯한, 무의미의 구름만을 남길 뿐이다. 꿈은 분명히 구체이지만, 오히려 구체이기 때문에 부재와 현존의 경계가 명확하며, 그곳은 짙은 기상 활동이 일어나는 선명한 전선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꾸고 싶은 꿈의 경계는 무의미이다.
꾸고 싶은 꿈을 꿈은 애도의 “성공”이라는 점에서 꾸고 싶은 꿈의 종결이다. 또한 그 종결, 마치 구원처럼 보이는 그 종결은 무의미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꾸고 싶은 꿈의 바깥으로 나와서는 더 이상 오타쿠로 있을 수 없다. 나아가, 꿈의 내용에 대한 애도가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멜랑콜리는 방향을 바꾸어 지속된다: 꾸고 싶었던 꿈의 결과가 무의미라는 점에서 사람은 다시 그 잔향에 천착하므로. 꾸고 싶은 꿈의 종결은 그 무엇 하나 해소하지 못한 채, 단지 꿈만을 거세할 뿐이다. 꿈은 종결되었으므로 시간이 흘러 구름이 걷힐 때가 되면 비로소 꾸고 싶은 꿈의 내용은 남지 않게 된다. 치료라고도 부를 수 있을 이 자연스러운 망각이야말로 2차 창작의 살해이고, 졸업 이상의 졸업이다. 남은 것은 단지 때때로 보여질 경계 뿐이다.
따라서 이 분석의 종점에는 꾸고 싶은 꿈은 꾸어져서는 안 된다는 주문이 있다. 반드시 도래한다는 성질이 만일 있다면 그 성질은 더이상 낙관적이지 않다. 오타쿠를 스스로 싫어하게 되지 않는 이상, 오타쿠는 평생 오타쿠이길 바라기 때문이다. 꿈이 종결될 때마다 새로운 꿈을 생산하는 전략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꾸고 싶은 꿈을 꾸어서는 안 된다. 이 필연적인 이중 구속을 뿌리치려면 꾸고 싶은 꿈을 꾸지 않고 실현하는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오타쿠는 (좁은 의미의) 2차 창작자가 도저히 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음이 따라 나온다. 이제 나는 끝으로 주장하는 바, 오타쿠의 꾸고 싶은 꿈을 둘러싼 이 이중 구속은 곧 오타쿠의 근본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