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와 시대의 일본 애니메이션은 그 구성이 다분히 정형화되었다. 요컨대 1분 30초 길이의 오프닝과 엔딩 애니메이션이 없다거나 본편이 두 개의 파트로 나뉘지 않는다거나 하는 일은 이제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전형에서의 일탈, 즉 몇몇 화에서 오프닝 또는 엔딩을 생략하는 일조차 하나의 상투구가 되었다. 동시에 오프닝, 엔딩 애니메이션에서 등장하는 구체적인 이미지들 역시 그렇다, 고들 흔히 여겨진다. 유튜브 등에 ‘애니 오프닝 특’ 내지는 ‘アニメOPあるある,’ ‘anime openings be like’ 등을 검색하면 그러한 이미지를 패러디한 영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말하자면 일본 애니메이션의 시청자들은 그것의 오프닝/엔딩을 ‘뻔한 것’으로, 곧 스킵해도 무방한 영상으로 대한다. 그러나 동시에 일본 애니메이션의 오프닝과 엔딩은 분명히 ― 위대한 애니메이터들이 모이는 ― 애니메이션 실험의 장이다. 몇 겹의 전혀 무관한 이미지의 자유로운 겹침이나 기하학적 도형의 운동으로 그려지는 리듬 등은, 그러니까 이른바 추상 애니메이션은, 일본 애니메이션 세계에서 특별한 위치를 점유하는 바로 그곳에서만 그려지는 명분을 얻는다. 그 특별한 위치란 애니메이션과 시각디자인, 하나의 독립된 뮤직비디오와 시리즈에 종속된 오프닝/엔딩 사이의 어딘가다.
https://youtu.be/TR3ma_60-m4
『슈타인즈 게이트』 오프닝 애니메이션. 의도적으로 여러 겹으로 다중 노출된 이미지들 사이를 빠르게 오간다.
https://youtu.be/_AVvkDDFD34
『히다마리 스케치』 엔딩 애니메이션. 노래의 리듬에 맞춰 기하학적 도형이 출현하고 운동하며 시각적인 운율을 만든다. 이외에도 빠르게 운동하는 배경 층위의 이미지와 정지된 캐릭터를 대비시켜 회전하는 공간을 만들었으며, 비트맵 이미지의 계단 현상을 재현한 새의 윤곽을 통해 마치 대상이 더 확대되어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오프닝/엔딩은 한편으로 상투적이어-보이는 이미지의 집합이라는 국면으로서, 그 반대편에서는 애니메이션 실험의 장이라는 국면으로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러나 왜 끊임없는 실험에도 불구하고 오프닝/엔딩 애니메이션은 시청자들에게 천대받는가? 시간 절약을 위해 배속으로 애니메이션을 보는 이를 비판하는 사람들조차 왜 1분 30초의 오프닝/엔딩 애니메이션을 스킵하는가?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 오프닝/엔딩 애니메이션이 애니메이션 시리즈 속에서 어떠한 역할을 맡아왔는지를 유비할 것이다. 그리고 유비를 발판삼아 『연풍』의 엔딩 애니메이션이 어떤 의미에서 ‘스킵할 수 없는 엔딩’이 될 수 있었는지를, 또 그것이 어떻게 엔딩 일반을 ‘스킵할 수 없는 것’으로 반전시키는지를 논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다. 그러니 오프닝/엔딩의 실태 조사를 통해 영상과 시청자 어느 한 쪽의 잘못이라고 훈계하지는 않을 것이다.
앞서 밝힌 두 대립하는 국면 이외에도 오프닝/엔딩 애니메이션은, 그것이 TV 애니메이션의 오프닝과 엔딩이라는 점에서 실용적인 목적을 가진다. 오히려 이러한 기능이 오프닝/엔딩 애니메이션의 근원적인 물성일 것이다. 즉, TV를 보는 시청자들에게 애니메이션이 이제 곧 시작함을 알리는 일, 또는 애니메이션이 이제 막 끝났으니 안심하고 채널을 돌려도 됨을 알리는 일이다. 그러므로 오프닝은 TV 채널을 배회하는 이들의 발을 잡아두는 것, 급하게 텔레비전을 켠 이들에게 90초의 여유를 주는 것, 흩어진 시선들을 한 곳으로 집중시키는 것이다. 반대로 엔딩은 시선을 잡았던 손을 열고 그들이 흩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편에서는, 오프닝은 광고의 비가 그치고 애니메이션이 이제 막 시작했음을, 엔딩은 애니메이션이 이제 곧 끝나고 광고 속으로 들어감을 알린다. 요컨대 오프닝/엔딩은 광고, 화면 속 파편적 정보들, 이전화 및 다음화가 아닌 그 애니메이션의 바로 그 화에 속하지만, 동시에 그 애니메이션 내부에서는 본편의 밖으로 쫒겨나 본편의 시작과 끝을 통지하는 신호로 전락하고 만다.
애니메이션의 본편에서 부정되며 그 외부의 광고에서도 부정되는 오프닝/엔딩은 차라리 하나의 액자다. 특별히 앞서 본 것처럼 오프닝/엔딩이 시간과 동일한 형태의 비대칭성을 갖는다는 의미에선 시간의 액자다. 액자는 “작품도 작품 바깥도 아니고, 안도 밖도 아니고, 위도 아래도 아니”다1. 즉 액자는 ― 그것이 보이든 보이지 않든 ― 외부의 벽에 대해서는 작품 내부의 요소이고 그 속의 그림에 대해서는 그것의 외부이다. 그러면서 액자는 하나의 프레임으로서 그것이 감싸고 있는 그림의 영역을 한정짓는다. 액자야말로 회화의 주위에서 그 회화를 수적으로 하나라고 부를 수 있게 하는 하나의 결정을 만든다. 회화가 아니고 액자가 회화의 경계를 지을 때 그 회화 자체의 경계는 그곳에 없다. 액자와의 관계가 없을 때 회화는 그 회화로 한정될 수 없다. 그러므로 액자가 그림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니고 오히려 그림이 스스로 액자를 필요로 한다. 『히다마리 스케치×365』의 4화, 6화, 9화에서 ― 시간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 A, B 파트의 사이에 아이캐치 대신 엔딩과 오프닝이 추가로 삽입된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다. 여기에서 엔딩과 오프닝은 각 파트의 경계를 설정하는 기호다. 어떤 의미에서 몽타주라 할 만한 A 파트와 B 파트의 연결을 끊고, 각 파트를 독립된 하나의 ‘화’로 만드는 기호다.
하지만 이때 회화는 액자의 방향으로 뻗어져 있다. 회화가 자신의 경계를 스스로 한정지을 수 없어 액자를 요청할 때, 액자는 그림을 인위적으로 하나의 대상으로 결정하는 동시에 그림과 함께 분리될 수 없는 하나가 된다. 그러므로 액자 안쪽 회화의 경계는 그 회화가 액자에게 그림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면서 흩어진다. 또는, 액자가 가르키는 회화의 윤곽선이 바로 그 액자가 회화를 보충하면서 액자와 함께 그림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이제 액자는 그림 속에서 회화가 그리지 못한 것을 그림으로써 그 회화의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 “연장된 의미작용의 영역”으로서2. 최초의 스킵할 수 없는 오프닝/엔딩은 이러한 의미에서 가능해질 것이다.
『연풍』의 엔딩 애니메이션에 대해 논하기 전에 재야비평가 異邦人(이방인)의 『연풍』 비평, 「애니 연풍(恋風)과 만화 연풍과의 비교」를 먼저 검토할 것이다3. 그는 이외에도 만화 『연풍』에 대한 5편의 아마추어적이지만 꼼꼼한 글을 적었다. 어쩌면 이 기획 전체가 이방인에 대한 메타비평으로 읽힐 수도 있으리라.
이방인에게 만화 『연풍』은 상징기호로 충만하다. 이방인에게 벚꽃은 『연풍』의 시작과 끝, 그 사이의 성장이자 코시로가 마음을 고백한 장소이고 코시로와 나노카의 치유의 장소이다. 이 모든 벚꽃의 중심에는 언제나 나노카가 있다. 그에게 나노카는 벚꽃, 즉 초월적 무결함이자 순수한 여성성이다. 이방인에게 코시로는 벚꽃으로서의 나노카를 만나고 진실되며 애틋한 마음을 떠올리는 인물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벚꽃은 『연풍』이 갖는 의미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연풍』에 등장하는 세 번의 벚꽃이 피는 봄은 코시로의 마음의 변화 내지는 발달이다. 이방인은 세 번의 봄이 각각 단순한 인식으로의 시작, 이별과 격렬한 마음, 영원한 연모의 맹세라는 발달 단계, 곧 시작과 끝, 그리고 완성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완성으로 향하는 두 번째 여름, 코시로와 나노카의 엔무스비 신사와 해가 뜨는 여름 바다로의 여행야말로 이방인에게는 두 사람의 마음이 내세에까지 이어짐을 암시하는 장치가 된다. 그에게 『연풍』은 벚꽃, 나노카와의 관계 속에서 치유되고 ─ 니체적 의미에서 ─ 성장하는 남성, 초월적이고 영원한 두 사람의 마음이 완성되는 과정을 그린 만화인 것이다4.
그러나 이방인의 애니메이션 『연풍』에 대한 글, 「애니 연풍(恋風)과 만화 연풍과의 비교」에서 그는 적어도 두 방향에서 순진했다. 먼저 이방인은 애니메이션 『연풍』을 만화 『연풍』과 비교하는 방식으로 읽기를 택했다. 이방인이 그랬던 것처럼 애니메이션을 향한 평가는 많은 경우 애니메이션을 향하지 않는다. 평가는 오히려 어떠한 특권적 위치의 ‘원작’을 향한다. 그곳에서 애니메이션은 원작을 ‘초월’하거나 혹은 ‘파괴’하지만, 그곳에 애니메이션을 위한 해석학은 없다. 요컨대 애니메이션이 원작을 ‘초월’했든 ‘파괴’했든 그것이 이미 밝혀진 원작의 미적인 진술에서 보충됐다거나 탈출했다는 식의 주장인 한에서는 애니메이션 텍스트를 위한 새로운 의미가 만들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때 애니메이션은 단지 원작에 첨가된 보충이 된다. 특히 원작의 요소가 애니메이션에서 빠졌을 때 ─ 예컨대 고흐의 그림에 그려진 한 켤레의 구두가 사실은 “각기 다른 짝을 지닌 두 구두일 수도, 두 개의 같은 쪽 구두일 수도, 구두 한 짝과 그것의 유령일 수도 있”는 만큼5 그 요소가 언제나 하나의 상징일 수 있으므로 ─ 사태는 애니메이션을 (그 상징이) 결핍된 것 또는 의미를 잃은 것, 따라서 미완성인 것으로 남긴다. 그러므로 이른바 원작 중심주의의 아래에선 애니메이션은, 그것이 언제나 원작의 의미를 재현할 수 없다는 점에서, 새로운 사유를 낳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원작 외부의 액자가 된다. 아즈마 키요히코가 자신의 블로그에 “…어째서 애니화 하지 않는지를 해명하는 건, 뭔가 만화는 애니의 ‘원작’이라는 생각을 인정하는 것 같아서, 만화가로선 하고 싶지 않습니다만”이라고 적었을 때6, 그는 오히려 원작 중심주의에 불만을 표한 것이다. 만화가 애니메이션의 원작이 되는 때, 곧 만화가 ‘원작’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는 때는 그 만화를 중심으로 애니메이션을 읽을 때이므로.
그러므로 이방인이 세 번의 벚꽃과 봄을 통해서만 코시로가 완성된다고 생각했을 때, 그리고 그것이 『연풍』이 의미하는 진리라고 독단했을 때, 그는 이미 애니메이션이 『연풍』에 가하는 어떠한 변화도 용납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나노카를 벚꽃 대신에 흙탕물로 은유하고, 두 번째 여름에서의 신사 여행과 일출을 삭제한 애니메이션 『연풍』은 이방인에게 만화 『연풍』에서 순수함과 초월성을 거세한 것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었다. 이방인이 애니메이션 『연풍』의 8화의 코시로가 나노카의 “흙탕물을 안마시고 버린다”고 쓴 것은 그에게 흙탕물이 사족에 불과한 원작과의 차이를 상징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흙탕물은 버려져야 했다. 어린 시절의 코시로가 흙탕물을 버리지 않고 버리기를 계속해서 지연시키는 장면과 집에 돌아가며 이 기억을 재밌는 듯 떠올리는 코시로의 모습이 교차하는 시퀀스는 잊힌 채.
다른 한 방향은 꼼꼼했던 그가 애니메이션으로서의 『연풍』을 읽을 때는 ─ 가장 애니메이션적인 요소인 ─ 오프닝과 엔딩을 스킵하기로 했음에 있다.
『연풍』의 엔딩 애니메이션7은 간결하다. 『연풍』을 보기 시작해서 1화가 끝날 즈음 맞이하는 첫 엔딩은 당황스럽기도 하다. 모래사장을 한가로이 걷는 세 사람의 윤곽이 비추어지고, 파도가 치고, … 그게 끝이다. 세 사람이 걷는 바다가 언제, 어디인지, 심지어 우리는 세 사람이 누군지조차 알 수가 없다.
https://youtu.be/kxnG9dawYcg
『연풍』 엔딩 애니메이션. 1화에서부터 8화까지의 엔딩은 세 사람이 바닷가를 걷는 장면이 그 전부이다.
그들은 하나의 층에서 걷고 있다. 뒤에서 비추는 태양(일출? 혹은 일몰?)의 역광이 그들의 두께를 제거한다. 아니, 그들이 정말 앞을 향해 걷고 있긴 한지도 의문이다. 아주 약간 왼쪽을 향한 화면의 바깥 방향으로 쳐나오는 파도만이 그들이 앞을 향해 걷고 있음을 지시한다. 실제로는 카메라만이 ─ 카메라라고 불릴 만한 것이 애니메이션에도 있다면 ─ 그들이 걷는 방향의 앞 쪽을 조금씩 향하고 있을 뿐이다. 한편으로는 의도적으로 설계된 색채와 구름과 파도의 특이한 형태가 본편과 엔딩을 분리시키는 듯하다. 『연풍』의 엔딩은 익명의 시공간, 익명의 인물들, 모호한 방향성으로 구성되고 분리된 텅 빈 엔딩이다.
이곳에서 『연풍』의 엔딩 애니메이션은 마치 『연풍』과 대립쌍을 구성하는 듯이 작동한다. 『연풍』은 좋으나 싫으나 문제적이고… 그럼에도 여전히 실험적이지 않은 고전적인 방식으로 구성된 것처럼 보인다. 코시로와 나노카가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연풍』은 나노카와 코시로의 클로즈업을 교대로 배치하면서도 이러한 절단을 관통하는 방향으로 벚꽃을 삽입했다. 나노카의 인상은 벚꽃을 경유하며 코시로가 혼자 남겨졌을 때까지도 코시로의 시선이 가리키는 화면의 반대편을 상상하게 한다. 만화 『연풍』이든 애니메이션 『연풍』이든 독자는 그 속에서 은유의 인상을 발견할 것이고, 이 발견 자체가 『연풍』 속에 내재되어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방인은 『연풍』의 성실한 독자이고, 그가 밝힌 『연풍』의 은유는 직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애니메이션 『연풍』은 앞서 논한 것처럼 엔딩의 방향으로 연장되어있다. 동시에 텅 빈 엔딩으로서의 『연풍』 엔딩 애니메이션은 이러한 비유의 발견을 정지시키고 1분 30초 동안 지연시킨다. 연장된 의미작용의 영역이 텅 비워져 있고, 따라서 상징으로 충만한 『연풍』에 어느 한 곳에 구멍이 뚫리게 됐다. 엔딩의 한 주인공으로서의 파도 ─ 그곳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파도와 인물 뿐이다 ─ 와 함께 『연풍』의 모든 기호가 부서지는 듯이.
이것이 만화와 애니메이션 『연풍』에 대해 평행하게 작동한다는 점에 주목하자. 그러면 『연풍』의 엔딩 애니메이션은 원작 중심주의를 그 자체로 지양하는 것이기도 하다. 원작 중심주의 아래에서 애니메이션 『연풍』이 원작의 보충이 되었을 때, 『연풍』의 엔딩은 원작에서 이어지는 의미작용을 정지시킨다. 그러고서는 그곳에 1분 30초 짜리의 빈 공간이라는 바이러스를 삽입한다. 이때 애니메이션 『연풍』이 반대로 원작의 의미를 변화시킨다. 『연풍』에 가해지는 원작 중심주의는 이 지점에서 스스로가 자신을 부정하게 된다.
그러나 『연풍』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나노카가 코시로에게 사랑을 고백하자 『연풍』의 엔딩 애니메이션이 변화한다: 모래삽이 떠내려가는 바다의 어떤 한 쪽, 그 삽으로 만들었을 모래성은 흔적도 채 남아있지 않은, 짧은 클로즈업이 덧붙여진다. 그곳은 모래성과 삽이 완전히 새로운 사물이라는 점에서 바다의 다른 곳이고, 곧 이 삽입은 어느정도 무작위한 삽입처럼 보인다. 그러나 두 장면 사이의 연결이 보장하는 바다의 동일함, 덧붙은 장면에서 클로즈업된 모래성의 흔적은 하나의 작은 서사를 간접적으로 제시한다. 엔딩의 세 사람, 아니 네 사람은 ─ 『연풍』과 그 엔딩의 긴밀한 관계는 엔딩의 인물들이 『연풍』의 주인공들일 것을 요청한다. 엔딩이 변화하기 한 화 전, 코시로의 회상은 엔딩에 어린 코시로와 나노카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동시에 첫 화부터 꾸준히 반복된 엔딩이 반대로 그 플래시백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 엔딩에는 어떠한 표지도 제시하지 않으면서도 『연풍』의 변화가 그 인물들이 누구인지를 암시한다. ─ 바다에서 함께 모래성을 만들면서 놀다가 해가 저물어 돌아가는 중이다. 남겨진 모래성은 삽과 함께 파도에 쓸려 무너진다.

『연풍』 9화에서부터 마지막 화까지 엔딩 애니메이션의 마지막 컷 중 한 장면.
나노카의 고백은 코시로의 근친 간 연애에 대한 의식적인 반동에 의해 실패로 돌아간다. 나노카는 방에서 뛰쳐나가려 하지만 그 짧은 간격 동안 코시로가 나노카의 팔을 잡아서 껴안는다. 나노카는 코시로를 뿌리치고 방을 떠난다. 두 사람은 이때 분명히 이어지려하는 마음을 전했다. 그러나 이 마음은 전해져야 할 이에게 도달하지 못한다. 그리고 엔딩이 시작된다. 그리고…. 따라서 『연풍』은 이 도달하지 못한 고백과 모래성의 흔적 사이에 이상한 연결을 만든다.
다음 화에서 이른 아침 집을 나간 나노카를 코시로는 만나지 못한다. 도달하지 못한 나노카를-껴안음을 폐기하기 위해서 코시로는 집을 나오려 결심한다. 그리고 화면은 실패한 고백과 의문스러운 껴안음 사이를 고민하는 나노카를 비추고, 다시 집을 알아보는 코시로를, 집에 돌아가기 싫어서 친구의 집으로 놀러간 나노카를 순서대로 보여준다. 조금 후 집으로 돌아온 코시로가 아버지에게 집을 나가겠다고 말하려 하자, 전화가 걸려온다. 나노카에게서 걸려온 이 전화에서 코시로와 나노카는 그 도달하지 못했던 고백에는 어떠한 배송 실수가 있었음을 서로 깨닫는다. 나노카는 예정보다 일찍 집에 돌아간다. 그러나 코시로는 새로운 집의 계약이 고정되어 있다. 둘은 함께 있게 되지만 그 도달하지 못했던 고백이 다시금 닿는 일은 없다. 하지만 “계속 말하지 못한 게 있었어. 기억해? 관람차에 탔을 때의 일. (…) 그때 난, 정말로 기뻤었어. 그래서 이대로라면 나…” 코시로와 나노카는 손을 잡는다. 분명하게, 연결된 전화, 연결된 손에 의해서 도달하지 못했던 고백은 변해 있다. 하지만 형제에 대한 두 사람의 다른 정의8에 의해 고백의 성공은 지연되고 배송 오류가 반복된다.
아침, 나노카는 혼자 깨어난다. 엔딩은 짐을 챙기고 문을 여는 코시로, 그리고 쏟아지는 햇빛과 얽히며 시작된다. 엔딩은 앞선 것과는 다른 모래성의 흔적으로 시작한다. 모래성은 아직 어느 정도의 형태가 남아있고 모래삽은 모래에 꽂혀있다. 여전히 파도는 모래성을 쓸어내린다. 온전한 모래성에 더 가까이 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모래성은 아닌 것. 『연풍』은 계속해서 도달하지 못한 고백들과 모래성의 흔적들을 교묘하게 연결하고 있다.

『연풍』 10화에서부터 마지막 화까지 엔딩 애니메이션의 마지막 컷 중 한 장면.
동시에 이 엔딩은 여태까지 명시적으로는 은폐되어 있었던 엔딩의 인물들을 직접적으로 밝힌다. 어린 코시로와 어머니, 그리고 나노카를 안은 아버지. 밝혀진 이 사실이 그다지 놀라운 것은 아니게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것이 남아있다. 네 사람은 정말로, 특별히 어머니-코시로와 아버지-나노카는 함께 있을까? 함께 걸어가는 세 사람을 보여주는 엔딩의 두 번째 컷에서 그들은 여전히 익명적이다. 반대로 세 번째부터 여섯 번째 컷에서 그들은 명시적일지언정 함께 있지 않다. 그들은 오로지 시선으로만 연결되어 있다. 차라리 엔딩은 이혼한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코시로와 나노카를 각각 대립쌍으로 둔다.

『연풍』 10화에서부터 마지막 화까지 엔딩의 세 번째 컷부터 여섯 번째 컷까지의 장면들 9.
엔딩은 대립을 해소하지 않은 채 첫 모래성의 흔적을 다시 비춘다. 코시로와 나노카는 여전히 서로에게 닿지 않는다. 앞서 보았던 교묘한 연결이 이제는 엔딩 깊숙히 내재하고 있게 됐다.
코시로가 분가하고, 나노카는 코시로의 집 문 앞에 몰래 수제 스웨터를 가져다 둔다. 이를 우연히 본 코시로가 직장 동료인 치도리와 함께 숨으려 했기에 코시로는 치도리에게 나노카에 대한 마음을 들킨다. 치도리는 코시로를 경멸하고 코시로는 방에 틀어박혀 폐인이 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코시로는 휴지를 사러 나가려다가 오렌지를 전달하려 몰래 집에 찾아온 나노카와 만난다. 그리고… 이러저러해서… 둘은 하룻밤을 보내고 (엔딩), 어머니의 집으로 여행을 가고, 출입이 금지된 부두에서 동반 자살을 생각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나노카의 친구들은 나노카에게 남자친구가 생겼음을 직감하지만 “어쩐지 무서”웠기에 확인을 중단한다. 회사를 관둔 코시로는 사에키 겐조, 코지로, 코히나타 나노카가 쓰여 있는 문패를 바라보며 사과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노카와 코시로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진 유원지가 아버지의 회사에 의해 사라지게 됨을 알린다.
폐원 공지가 붙어있는 유원지에 코시로와 나노카는 다시 돌아간다. 유원지에서 코시로와 나노카는 모래사장에서 놀다가 흙투성이가 되고, 나노카가 씻으러 가자 어떤 여자아이가 코시로에게 벚꽃이 떨어진 흙탕물을 건넨다. 코시로는 고마워하며 마신다. 분명히 이때, 어린시절의 코시로가 마시기를 계속해서 지연시켰던 나노카의 흙탕물이 코시로에게 도달했다. 코시로와 나노카는 몸을 섞은 연인 사이가 되었고, 지연되었던 고백의 성공은 이루어졌다. 도달하지 못했던 고백은 서로에게 도착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연풍』은 이어진다.
문을 닫은 밤의 유원지에서 코시로와 나노카는 정지한 관람차에 다시 타본다. 관람차가 작동하는 일은 없다. 그러나 두 사람이 기도했을 때, 관람차는 딱 한 번 움직인다. 날이 밝고 유원지가 열자 둘은 유원지에서 나선다. 언젠가 사라지게 될 유원지의 나무에 아이아이카사를 그리고, 매년 봄에 다시 오자며 약속한다. 앞서 걷는 나노카의 뒷모습을 보며 코시로는 “좋아한다”고 작게 말한다. 그의 수줍은 고백이 나노카에게 도달할 일은 없다. 둘의 영원한 미래를 향한 약속이 지켜질 일은 없다. 그러자 『연풍』의 마지막 엔딩이 시작한다.
여태껏 엔딩이 열중해온 모래성의 흔적은 나노카의 고백과 코시로의 대답이 서로에게 도달하지 못한 그때부터 계속해서 미끄러져 왔다. 『연풍』이 끝날 때가 되면 모래성의 흔적을 계속해서 호출해 왔다. 그렇다고 흔적이 실패한 고백이 있던 그때에 고정되어 있지는 않다. ─ 『연풍』의 엔딩은 두 번 변하고, 즉 세 양상이 있다. 이 세 엔딩이 이방인의 세 봄과 다르다는 것은 명백하지만, 적어도 그의, 애니메이션 『연풍』에는 두 번의 봄만이 있기에 그 의미가 단발적이고 허무하다는 주장은 이 맥락에서 부정된다. ─ 나노카와 코시로 사이에서 교환되는 언어가 계속해서 수신이 실패될 때, 혹은 타인이 그들을 환대할 수 없었을 때, 『연풍』을 관통하는 모래성의 흔적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모든 흔적은 같지 않다. 흙탕물이기도, 나노카의 고백이기도, 코시로의 계약이기도, 구겨진 나노카의 편지이기도, 친구들이 나노카의 남자친구에 대해 알기를 중단한 일이기도, 나무에 그린 아이아이카사이기도 한 그 모든 것들이 쌓여가는 공간으로서. 그러므로 『연풍』의 엔딩은 끝없이 변화한다.
『연풍』의 내부에서 코시로와 나노카는 모래성의 흔적을 극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패한 고백에도 불구하고 둘은 연인 사이가 되었고, 코시로의 계약에도 불구하고 둘은 함께 살게 됐다. 그러나 여전히 『연풍』은 계속해서 어떠한 소통의 실패: 나노카의 친구들, 치도리, 그리고 아버지와의; 전달되지 못하는 것들: 아이아이카사, 코시로의 고백; 을 제시한다. 그리고 어쩌면 『연풍』은, 마치 극복한 것처럼 보였던 수신 실패가 사실은 극복되지 않았음을, 코시로가 마신 흙탕물은 나노카가 건넨 흙탕물과 다른 것임을, 따라서 아무것도 해소되지 않았다고 적는다. 『연풍』은 계속 이어질 것이며 『연풍』의 엔딩은 끝없이 반복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노카와 코시로는 소통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실패했던 고백을 계속해서 수정하고 새롭게 써 보냈던 것처럼, 나노카가 형제는 왜 사랑하면 안되는지를 묻고서는 “나, 포기하지 않을거야”라고 말했던 것처럼. 이것이 또 다른 수신 실패로 이어지고 변화한 새로운 엔딩이 시작하더라도 『연풍』은 중단되는 일이 없다. 코시로의 말처럼 “사과해야 할 사람들은 따로 있”고, 그러므로 둘은 다른 인물들과 관계하기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교묘하고 은밀하게 변화하면서도 끊임없이 호출되는 『연풍』의 엔딩 애니메이션이야말로 이것을 보장한다.
이제 나는 이방인과 “결말은 다를지 모르지만 같은 위치에 착지”했다. 『연풍』의 엔딩이 보장하는 영속성, 코시로와 나노카가 불가능한 소통을 끊임없이 도전하는 영속성이야말로 이방인의 “삶을 증명하기 위한 영웅적 행위”에 다름아니다. 이것으로 이방인이 『연풍』의 엔딩을 스킵했음은 명백해진 듯하다.
『연풍』의 엔딩은 『연풍』이라는 단일한 애니메이션의 심급 내에서만 작동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 비평이 하나의 메타비평이라는 점에서 이 비평 내부에는 몰래 숨겨진 모래성의 흔적이 있다. 그것은 나에게 읽혀진 이방인의 글이다. 그리고 내가 그에게 전한 『연풍』의 엔딩을 스킵하지 말라는 명령, 전달되지 못할 명령이다. 이 흔적은 마치 『연풍』의 엔딩이 『연풍』의 방향으로 그랬던 것처럼 내 안에서 맴돈다. 이 쓰여진 비평에 의해서 모래성의 흔적은 나의 방향으로도 뻗어져 나오게 됐다.
이제 나는 어떤 애니메이션의 엔딩도 스킵할 수 없다. 내가 적었던 『연풍』의 엔딩 비평이, 모래성의 흔적이, 다른 애니메이션을 보는 나에게 와서 작동할 때 나는 그 애니메이션과 엔딩이 『연풍』적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인다. 그리고 어쩌면 액자의 다른 한 방향인 오프닝을 볼 때도.
그리고 희망컨대 이 글을 읽는 독자의 방향으로도,
Derrida, J. The Truth in Painting (Geoffrey Bennington & Ian McLeod, Trans.), page 9. University of Chicago Press, Chicago, 1987. ↩
김호영. 프레임의 수사학, 39쪽. 문학동네, 경기, 2022. ↩
『연풍』의 엔딩 애니메이션에 대해 논하기 위해 『연풍』을 먼저 논하자니 조금 쑥쓰럽다. 그러나 그 엔딩 애니메이션이 ─ 다음 절에서 확인하게 될 ─ 스킵할 수 없는 엔딩이라는 점에서, 또 『연풍』이 ─ 적어도 한국에서는 ─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만화·애니메이션이었다는 점에서 그 비평 속에 『연풍』의 서술은 불가피함을 이해해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바로 그 이유에 의해서 이 글은 『연풍』의 비평이기도 하다. ↩
이방인의 『연풍』에 대한 논의는 아래 6개의 글 참조. 접속 일자는 모두 2024년 2월 29일.
異邦人, 연풍(恋風)ㅡ 그 남자의 마음의 자각과 구원, 異邦人のTISTORY, 2016년 5월 12일. https://earthdreamer.tistory.com/2.
───, 연풍(恋風)-나노카의 상징성과 영원한 맹세(1), 異邦人のTISTORY, 2016년 6월 23일. https://earthdreamer.tistory.com/23.
───, 연풍(恋風)-나노카의 상징성과 영원한 맹세(2)-1, 異邦人のTISTORY, 2016년 7월 2일. https://earthdreamer.tistory.com/25.
───, 연풍(恋風)-나노카의 상징성과 영원한 맹세(2)-2, 異邦人のTISTORY, 2016년 7월 11일. https://earthdreamer.tistory.com/30.
───, 만화 연풍(恋風)의 상징성 -벚꽃과 바람을 중심으로-, 異邦人のTISTORY, 2016년 11월 16일. https://earthdreamer.tistory.com/50.
───, 애니 연풍(恋風)과 만화 연풍과의 비교, 異邦人のTISTORY, 2017년 1월 17일. https://earthdreamer.tistory.com/60. ↩
강우성. 파레르곤의 논리: 데리다와 미술. 영미문학연구회, (14):5-34, 2008. ↩
あずまきよひこ. あずまきよひこ.com» Blog Archive» よつばとアニメ, web.archive.org, Feb. 23, 2014. https://web.archive.org/web/20140223002337/http://azumakiyohiko.com:80/archives/2008/12/05_093234.php, Accessed: Feb. 29, 2024. ↩
콘티, 연출: 오오모리 타카히로 (大森貴弘), 작화: 키시다 타카히로 (岸田隆宏) ↩
나노카의 정의는 코시로에 의해 수정되기는 하지만 여전히 사회 규범과는 일정하게 유리되어 있다. 이 사실에 주목해 애니메이션 『연풍』으로부터 로리콘 애니메이션이 발명되었다고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연풍』은 여전히 로리콘이 아니고 형제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순수한 로리콘 애니메이션을 구성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에 대한 논의는 글의 주제에서 떨어져 있으므로 생략한다. ↩
간단한 캐릭터 디자인을 가진 인물들을 그린 일상적인 연기 작화에서의 주름의 섬세함이 어디까지 가능한지는 키시다 타카히로가 그린 이 컷들에서 명백히 보여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