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기 에반게리온』의 SF 메카와 모에, 『최종 병기 그녀』의 싸우는 미소녀가 그랬듯 『오빠는 끝!』은 우리 시대 ‘씹덕’들의 로망이다. 그러나 이 어렴풋한 로망을 해명하고자 할 때 『오빠는 끝!』이 자아내는 의문은 입체적이다. 이는 『오빠는 끝!』이 일상계와 로리콘 애니메이션, 또 TSF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하면서 만들어 내는 어떠한 이미지들이 그 중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빠는 끝!』은 시청자를 끊임없이 참여시킨다. 동시에 각 장르의 요소가 엉켜가며 시청자 내부에서 로망은 스스로 발아한다. 주인공 오야마 마히로의 반성장적 경로를 추적하면서 필자는 TV 애니메이션 『오빠는 끝!』에 은폐되어 있는 시대정신들을 들춰보려 한다.
올 1분기에 방영됐던 TV 애니메이션 『오빠는 끝!』이 그 시작과 동시에 거대한 ― 정체를 알 수 없는 ― 반향을 일으켰음은 분명하다. 에로만화의 영역으로 터부시되던 로리와 TS의 에로티시즘이 대중의 영역을 침범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바로 직전에 방영을 마친 『봇치 더 록!』이나 『체인소 맨』 등이 만들어 낸 ‘작화 미학 붐’덕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일상계의 문법에서도, 일본 TSFTrans–Sexual Fiction 의 문법에서도 빗겨나가있는 『오빠는 끝!』의 화제성과 흥행은 그 자체로 어떠한 시대적 의미를 갖고 있을 테다.
일상계 만화나 애니메이션에는 그 등장인물 구조의 형식에도 불구하고 에로스가 완전히 거세되어 있다. 미소녀들의 공간에서 남성은 완전히 배제되어 있고, 독자들은 하나의 시선으로서 오로지 캐릭터들의 삶을 관조할 뿐이다. 그 흔한 서비스신마저 대개의 경우 담담하게 묘사된다. 이것은 나가야마 카오루가 저서 『에로만화 스터디즈』에서 바라스이(ばらスィー)의 일상계 만화 『딸기 마시마로』를 ‘욕망과 충동을 멈춰놓은 상태’, ‘은폐되고 무의식화 된 에로스’로 표현한 것처럼 역설적으로 도착적인 상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1.
그러나 『오빠는 끝!』은 오프닝의 노골적인 클로즈업과 물이 흐르는 스쿠미즈의 묘사에서부터 드러나듯 섹슈얼한 욕망이 가감 없이 드러난다. 거기에 2화, 8화 등의 긴 목욕신은 TV 애니메이션의 에로티시즘 한계 실험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상계 애니메이션에서도 『히다마리 스케치』 등에서 목욕신이 자주 그려지지만, 액체에 젖은 피부 사이의 마찰과 탕 안에서의 연기 작화2에 이만큼 고집하지는 않았다. 일상계의 목욕신은 표면상 말 그대로 ‘일상적인 목욕 행위’의 묘사일 뿐이고 명시적인 에로스는 등장하지 않는다. 『오빠는 끝!』의 마구잡이로 흔들리는 리얼리즘적 ‘작화–이미지’가 애니메이션의 에로티시즘을 그 자체로 드러낸 것이다.

『오빠는 끝!』 1화 콘티의 한 장면. 마히로의 나체–이미지는 손에 의해 시각적으로 단절된다. 이 쇼트의 리얼한 작화는 단절의 해소를 담지하고 있다.
이곳에서 『오빠는 끝!』은 일상계 장르에서 빗나간다. 그러나 이는 장르에서 탈출함이 아니다. 오히려 장르에 감추어져 있던 욕망을 열어밝히는 일이다. 말하자면 일상물 난민들이 탐독하는 R-18 백합 팬픽의 에로티시즘 이미지가 표층의 영역 ― TV 애니메이션 ― 으로 운동한 것이다. 곧, 시청자인 일상물 난민의 ‘비일상’적 욕망이 일상계 애니메이션으로 투영된 것이 『오빠는 끝!』인 셈이다.
에로만화나 2차 창작에서 발생한 요소가 ‘양지’로 전파되는 일은 빈번하지만, 『오빠는 끝!』에서 일어난 일은 ― 『오빠는 끝!』이 TV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에서 ― 또 다른 계보적인 해석을 필요로 한다. 이는 1990년대 초 이후 금기시되었던 로리의 에로틱한 묘사가 대중과 가장 가까운 TV 애니메이션에 어떤 방식으로 등장할 수 있었는지와 관련된다.
미소녀계 애니메이션으로선 처음으로 로리의 에로티시즘을 묘사한 『아이들의 시간』이 그랬던 것처럼 ― 그 수가 많지는 않지만 ― TV 로리콘 애니메이션은 어린이와 어른의 관계를 조망하며 어떠한 이념을 담으려 했다. 『아이들의 시간』은 그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어른의 소년성과 아이의 청년성을 고발했고3, 『오늘의 5학년 2반』은 아이의 성숙함을 기호적인 극화체를 사용해 밝혔다. 그리고 『Fate/kaleid liner 프리즈마☆이리야』에 와서는 ‘로리’를 어른보다 더 나은 존재로 예찬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우회는 아이를 벗기는 것에 대한 죄의식이나, 대중들이 백안시하는 것에의 두려움에 의해 나타나는 것일까? 어찌 되었건 로리의 섹슈얼리티를 그리는 TV 애니메이션은 그 내부에서부터 명시적으로 ‘쾌락 장치’에서 도망쳐 왔다.
반면에 『오빠는 끝!』은 여자 중학생의 나체를 그리는 데에 대한 어떠한 핑계도 대지 않는다. 마히로와 미하리가 웃옷을 벗고, 머리를 감고, 탕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신은 오로지 ‘보고 난 후엔 무슨 내용이었는지 잊어먹는’ 일상계의 문법 속에서 묘사되었을 뿐이다. 이러한 무의미성은 리얼한 연기 작화로 그려지는 노골적인 아이캐치에서 더욱 극대화된다.

『오빠는 끝!』 2화 아이캐치. 본편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도착적인 복장을 한 마히로의 모습이 그려진다.
무엇보다, 12화의 후반부에 마히로가 친구와의 눈싸움을 오래간만이라고 느끼면서 로리로 남을 것을 선택하는 신의 절대적인 교훈을 읽을 수 있는 시청자는 아무도 없을 테다. 그 대신 ‘오빠 개조 계획’과 의도적으로 낭만화된 ‘로리로 남음’ 사이 특유의 간격이 시청자의 의미 창조를 가능케 할 뿐이다.
결국 『오빠는 끝!』에 대한 의문은 곧 ‘오빠 개조 계획’으로 소급된다. 나가야마 카오루에 따르면 “트랜스섹슈얼의 주체가 여성의 신체를 직접 고른다는 케이스는 매우 드물고, 대부분은 폭력이나 협박을 통한 강제 성전환이거나 […] 속임수로 인해 변화된다.4” 요컨대 히키코모리를 치료하기 위해 성전환을 시키는 일은 평범한 TSF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오빠는 끝!』은 마치 ‘생명 공학 SF’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히키코모리의 문제는 흔히 오타쿠와 함께 다루어지고, 심지어는 더욱 유비되어 동일시되기까지 한다. 1화의 후반부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천재 여동생의 오빠라는 중압감 등에 의해서 히키코모리가 된 ‘에로게를 사랑하는 고고한 자택경비원,’ 주인공 오야마 마히로는 그만큼 현대를 살아가는 남성 씹덕들이 강하게 빙의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한편, 오빠 개조 계획 중의 마히로는 각 화의 제목대로 TSF의 구조를 따른다. 이때 남성인 시청자의 시선이 주인공과 동일시되면서도 동시에 주인공은 여성으로서의 체험을 한다. 『오빠는 끝!』은 일상계의 문법을 통해 이 지점을 심화시킨다. 『케이온!』 이후, 적어도 2010년대 후반, 많은 일상계의 과제는 ‘독자의 버킷리스트를 한 줄 늘리는 일’이었다5. 『오빠는 끝!』이 히키코모리의 여자아이화를 그리는 맥락도 이곳에 있다.
“[…] 하지만 사실 지금은 기분이 묘하게 편하다. 자신이 제 주제에 맞는 위치에 돌아간 느낌이 들어. 이제 차라리 오빠는 끝으로 하고 이대로…” 1화 후반부, 히키코모리가 될 때의 자기 모습을 회상하며 말하는 독백에서 출발한 마히로의 퇴락(빠져있음)은 일상계적 경로를 따라 브래지어를 구매하거나, 긴 머리를 감는 법을 배우고, 오줌 참기를 어려워하기도 하며 이어진다6. 씹덕 시청자가 이 일상계적 경로의 퇴락(빠져있음)을 추체험하는 동안 ‘나도 로리가 되고 싶다’로 상징되는 『오빠는 끝!』의 로망이 비로소 발생한다 (마치 『케이온!』이 그랬던 것처럼).
마지막 화, 모두와 함께 온 온천여행 도중 급작스레 ‘여자아이가 되는 약’의 약효가 다해 마히로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지려 한다. 큰 일을 막기 위해 미하리는 여분의 약을 내밀지만, 이 약을 먹으면 다시 한동안은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다. 어른과 아이, 양자택일의 상황에서 마히로는 스스로 로리로 머물기를 택한다. 그와 동시에 로리로서 호명된 마히로가 웃으며 친구들 곁으로 달려 안길 때, 아무에게도 호명되지 않는 히키코모리 어른으로서의 마히로는 철저하게 승화된다. 그 클로즈업에서 마히로의 바로 위를 은은하게 밝히는 광원효과와, 3콤마와 2콤마가 섞여 그려진 섬세한 작화가 신 전체를 낭만화할 때 승화의 추체험은 히키코모리로서의 시청자조차 그 순간 지워버린다. 눈밭 위에는 오로지 웃으며 뛰어노는 아이들만 남겨진다.


『오빠는 끝!』 12화의 한 장면.
그렇게 마히로는 『오빠는 끝!』의 끝에서 멋진 오빠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성숙해지기를 스스로 거부한다. 오오니마이역(逢二妹駅)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마히로와 시청자는 반성장을 향한다.
반성장은 성장의 반대말이 아니라 스스로가 ‘성장물’이 되기를 거부하는 일이다. 어떠한 형태의 성장의 반대개념도 결국 성장의 형이상학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반성장 속에서는 성장물의 구조 ― 소년성이 일정한 노력을 통해 기호화된 통과의례를 넘어 청년성으로 점프하는 ― 는 해체되고 주인공은 소년성–청년성 이항대립의 체계에서, 그리고 어른이 되기를 재촉하는 ‘성장’이라는 신화에서 해방된다. 요컨대 어린이와 어른이 엉키는 TV 로리콘 애니메이션이야말로 반성장 서사로 독해되어야 한다. 로리콘 애니메이션으로서의 『오빠는 끝!』도 어른이 되어버린 마히로의 ‘속’과 로리가 되어버린 마히로의 ‘겉’의 이항대립을 해체하는 방식으로 반성장을 그려낸다. 히키코모리는 ‘여동생의 장난감’으로 상징되는 소년성을 가지고 있고, 로리는 미하리가 “오빠 개조 계획은 기대 이상의 성과려나~”라고 자랑스레 말한 것처럼 어른스러움을 가졌다. 그러나 일상계의 장르적 특성 속에서 ‘오빠 개조 계획’은 즉각적이지 않고 이산적이지도 않다. 누구도 마히로의 성장을 재촉하지 않는다. 그곳에서 마히로는 자기도 모르게 개조되어 간다.
온천 속에서 어른이 될 뻔한 마히로보단 아니겠지만, 어른이 되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갑작스럽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어른이 되어버린 우리들은 여전히 소년성을 가진 채로 각자의 사회 속에서 방황하고 불안에 떤다. 불안장애를 가진 은둔형 외톨이, 히키코모리 청년은 이런 맥락 속에서 발생하는 것일 테다. 일상성조차 가지지 못한 이들에게 불안이나 고통을 이겨내어야만 비로소 실존한다고 말하면서 밖으로 나가기를 재촉한다면 단지 어떤 ‘꼰대’의 헛소리처럼 들리지 않을까.
반대로 『오빠는 끝!』은 우리 시대 씹덕의 로망과 함께 반성장의 체험을 통해서 히키코모리 시청자를 회유한다. 요컨대 어디든 끌려다니기만 했던 마히로가 스스로 로리로 남기를 선택함이 ‘오빠 개조 계획의 성공’이었음은 불안과 멀어지고 일상계의 세계에 빠지는 일을 예찬하는 것이다. 이러한 묘사는 실존철학 내지는 주체 모델이 더 이상 히키코모리로 대표되는 현대의 문제를 진단할 수 없게 되었음을 암시한다.
전쟁 이데올로기의 저편에서 태어난 소외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일상성에서 벗어나 영웅으로 향하려는 결단이 아니다. 그 대신 잃어버린 일상성을 되찾으려는 새로운 실존철학, 일상성 속에 엉켜있는 본래적 실존의 형상을 발굴하는 일이 요구되어야 한다. 이 일은 이제 철학이 아니고 오히려 대중문화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며, 옷을 벗어 던지고 ‘로리화’ 하는 『오빠는 끝!』이야말로 동일시된 시청자들과 함께 그 첫 발을 내디뎠다.
“내가, 우리들이 마히로쨩이다” (俺が、俺たちがまひろちゃんだ)7.
비평 ― 연구가 아니라 ― 의 주제가 되는 오타쿠 문화의 산물은 다양하지만, 특별히 ‘애니메이션 비평’은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애니메이션 영화’에 머무르고 있어 보인다. 즉 오타쿠 애니메이션 비평이 아니라 영화 비평으로서 애니메이션 비평은 기능하고 있다. 덕분에 『너의 이름은。』에서 다채로운 쇼트에 의한 세밀한 식사 묘사가 주목받을 동안 달리기에 생명을 불어넣는 오키우라 히로유키의 리얼계 연기 작화나 하시모토 타카시의 멋진 폭발 이펙트 작화는 잊히고 말았다.
최근 개봉한 몇몇 영화가 보여주듯 우리나라에서의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한 관심은 늘어나고 있다. 꼭 움직이는 회화로서가 아니더라도 이제는 영화 비평과 독립된, 애니메이션의 용어를 사용한, 오타쿠들을 위한 애니메이션 비평이 더 풍부해지기를, 또 이를 위한 공간이 형성되기를 바란다.
나가야마 카오루. 에로만화 스터디즈 (선정우 역), 334-338. AK 커뮤니케이션즈. 2022. ↩
일상계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연기 작화는 적어도 『야마노스스메 서드 시즌』 이후부터 다시금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후 『봇치 더 록!』, 『야마노스스메 Next Summit』, 『Do It Yourself!! -두 잇 유어셀프-』 등에서 이러한 경향이 이어져, 적은 숫자이지만 확실한 발자취를 남기고 있다. 그 중에서도 『봇치 더 록!』과 『오빠는 끝!』이 기록한 흥행은 일상계 애니메이션의 판도를 바꿀만한 것이었다. 유비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상계 작화애니’가 일상계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지평이 되리라 믿는다. ↩
『아이들의 시간』은 영리하다. 초등학교 교사와 초등학생, 그리고 보호자 사이에서 그려지는 갈등은 언뜻 에로틱하지만 동시에 사회고발적이고 교훈적이다. 이에 필자는 『아이들의 시간』을 성장물 일반이 상정하고 있는 어른–아이의 이분법을 해체하는 작업으로 독해한 바 있다. 『아이들의 시간』이 TV 애니메이션으로서는 최초로 로리의 에로티시즘을 묘사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아이들의 시간』 실험의 성공 이후에 방영된 모든 로리콘 애니메이션은 『아이들의 시간』에 일정한 빚을 지고 있으리라. ↩
나가야마 카오루. 에로만화 스터디즈 (선정우 역), 321-323. AK 커뮤니케이션즈. 2022. ↩
윤은호. 2010년대 후반 일상계 아니메의 변화에 관한 연구. 만화애니메이션연구, 65:97-125, 2021. ↩
일본의 TSF를 완전히 퀴어적 관점에서 보면 곤란하다. TSF에서 남성과 여성은 그 성역할이 이분법적으로 나뉘어 있고, 그 서사로는 성전환의 주인공이 반대편 성에 적응하거나 ‘타락’하는 과정이 주로 그려진다. ↩
히로야마 히로시 트위터, https://twitter.com/hiroshi_/status/169060839639402496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