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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A 비평 CRITICISM 2025.07.17

mono를 위한 변명

https://youtu.be/OssMWb7KIO8

‘일상계’는 지금도 변하고 있는 것 같다. 이 변화를 단일한 흐름으로 일축해 서술할 수는 없을 테지만, 과거의 이름들인 《히다마리 스케치》, 《케이온!》, 《딸기 마시마로》 등을 떠올리고 나서, 다시금 《봇치 더 록!》, 《오빠는 끝!》, 《별무리 텔레페스》를 떠올려보면 그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어 보인다. 윤은호는 2010년대 후반에 나타난 새로운 ‘일상계’의 모습을 “일상계 아니메의 문법을 유지하면서도 특정 주제와 지역적 배경을 바탕으로 ‘대지를 향해 살아나가는 느낌’(大地に目指して生きてる感じ)을 가지고 현실과 마주하는 아니메”로 그리고 있다 (윤은호, 2021). 당연하게도 이 모습의 한 주역은 《유루캠△》이다.

2010년대 후반 혹은 헤이세이 후반을 지나, 2020년대 초에는 《봇치 더 록!》, 《Do It Yourself!! -두 잇 유어셀프-》, 《야마노스스메 Next Summit》, 《오빠는 끝!》이 연달아 방영됐다. 이들은 애니메이터 개개인의 개성을 드러내려 하며, 따라서 이들을 교토 애니메이션의 일상계 애니와도 구별되는 새로운 모습의 ‘일상계 작화애니’ 내지는 ‘작가주의 일상계 애니’라고 부르고 싶다.

일상계의 이 두 흐름이 그 모든 변화를 대표하지는 못하지만, 분명히 《mono》의 두 면모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mono》가 도저히 (좋든 싫든) 레이와의 외관으로 리모델링 했을 뿐인 《유루캠△》으로 읽히지 않는 것은 《mono》가 현실을 재현re-present하는 게 아니라 현시present하려고 함에 있다.

들어가며 ― 현실을 재현하는 일상계들과 《mono》

일상계를 닫힌 원환으로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 예를 들어 《히다마리 스케치》를 생각해보면, 소원 성취를 우승 상품으로 걸었던 퀴즈 이벤트 ‘히다마리 왕 결정전’에서 우승자의 소원은 어떤 개인적인 바람도 아닌 4기 제작이었다. 《더 무비 케이온!》의 엔딩은 아마 그려지지 않을 ‘아즈냥의 졸업 여행’을 암시하며, 그녀들의 관계가 언제까지고 변하지 않을 거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덕분에, 그녀들은 사쿠라가오카에서 졸업했지만, 독자들은 아직도 《케이온!》에서 졸업하지 못했다. 원환이란 《케이온!》에서 나가더라도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그들은 《케이온!》이 만든 닫힌 가상의 일상에 갇혔다.

독자를 가상의 닫힌 원환에 가두는, 혹은 도피시켜주는, 퍼키 팻으로서의 일상계는 종종 비난받아왔다. 우노 츠네히로는 『제로년대의 상상력』에서 ‘공기계’空気系를 탈-세카이계의 가능성으로 긍정하면서도 여전히 (《러키☆스타》 등의) “‘공기계’ 작품군이 그리는 세계는, 현시점에서는 남성 유저의 ‘소유’욕이 보장되는 범위에서 축복받는 일상성에 지나지 않는 (…) ‘모에’ 보충제”라며 선을 그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모성의 디스토피아 EXTRA」나 『젊은 독자를 위한 서브컬처론 강의록』 등에서 일상계, 특히 《케이온!》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무장소성과 무시간성, 그리고 이상화된 일상으로 특징지었다. 그가 말하는 일상계의 무시간성은 “아이를 낳아, 키우고, 그리고 죽어간다는 시간적인 운동에 대한 저항 내지는 배제”다. 이 ‘무시간성’이 정말로 무시간인지는 의문이지만, 아무튼 이 배제는 여전히 일상계의 중요한 특징으로 남아 있으며, 일상계를 둘러싼 흔한 비난의 초점이 된다.

다만 일상계의 무장소성과 성지 순례로써 ‘평범한 장소’에 새로운 의미를 삽입한다는 설명은 2010년대 후반의 새로운 일상계의 모습에 의해 힘을 잃었다. 그러한 일상계 작품은 어디에나 있을 법한 익명적 거리를 그리는 대신, 바로 그 곳에만 있는 지역 특유의 장소를 재현한다. 이런 작품의 성지 순례는 평범한 장소를 허구로 덮어쓰는 일이 아니라, 허구를 매개로 특별한 장소의 매력을 (재)발견하는 일이다. 일상계의 원환적 세계가 현실을 재현하면서, 그곳에 갇힌다 한들 독자는 여전히 현실을 향해 있게 된다. 거의 완전히 캠핑 커뮤니티가 되어버린 유루캠프 마이너 갤러리를 참조하자.

이를 두고 현실 ― 유튜브 ― 에 의한 허구 ― 만화와 애니메이션 ― 의 패배라는 우노의 표현을 빌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허구는 ‘현실’에 패배한 적이 없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숏이란 무엇인가』에서 영화를 ‘현실’에 가깝게 만드려는 앙드레 바쟁을 비판하며 “일단 찍혀버린 영상의 영화적 재현은 (…) 적당히 교묘하게 ‘표상’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결코 ‘현실’ 그 자체는 아닙니다”라고 말한다. 굳이 같은 주장을 하는 다른 수많은 이들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유튜브의 영상들이 얼마나 ‘현실’이 아닌지는 이미 모두가 알고 있으리라. 오히려 ― 유튜브 비평적인 작품인 《흘러가는 나날, 밥은 맛있어》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 유튜브의 영상들도 2010년대 후반 일상계의 새로운 모습에 닮아있다. 여기에서는 유튜버가 소개하는 장소 내지 상품들이 ‘성지 순례’의 대상이 된다. 유튜브 영상과 일상계는 아마도 다큐멘터리와 (픽션) 영화의 관계와 같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근본적으로 유튜브가 일상계와 다른 점은, 유튜브는 비춰진 영상이 현실이라는 인상을 주지만 만화나 애니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그 2010년대 후반의 새로운 일상계의 모습이란 어디까지나 현실의 ‘재현’이다.

예를 들면 《유루캠△》의 야마나시는 우리 세계의 야마나시를 충분히 잘 복제한 가상의 공간이고, 그곳에서 가상의 주인공들이 캠핑을 하거나 캠핑장을 만든다. 여기에서 《유루캠△》의 리얼리즘은 현실의 풍경을 정교한 배경미술로 옮겼다는 의미에서만 리얼리즘이다. 《유루캠△》은 그 전체가 《유루캠△ SEASON 3》 7화의 허풍스러운 회상 장면들만큼 허구적이기 때문에 ‘유루’할 수 있다.

이 상황에서 ― 이미 에피소드의 제목이 지시하고 있듯 ― 《mono》 1화 〈mono의 여정〉에서의 자기언급self-reference과, 주인공들의 동아리인 ‘시네포토’는, 《mono》를 원환적 구조의 일상계와는 완전히 다른 위치를 점유하게 한다. 이제 이를 밝혀내 보자.

에세이 만화로서의 《mono》

“죄송해요 말하는 걸 깜빡했어요!! 여고생이 주인공인 만화로 부탁드려요!!”
→ “알겠습니다 해볼게요”
“먹는 요소도 있으면 반응이 좋을지도요!!”
→ “요즘 먹는 만화가 잘 팔리기는 하죠!”
“그리고 지역성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작가님 코후에 사시니 무대는 야마나시로 하면 어떨까요?”
→ “좋네요! 그리고 마스코트 요소로 고양이도 넣고 싶죠!”
“전작 주인공이었으니 고양이는 빼죠”

하루노는 《고양이를 태우고 살짝 저기까지》의 연재를 끝낸 후 여고생 4컷 만화를 그리기로 편집자와 상의한다. 1화의 엔딩은 사츠키와 안이 모델인 그 4컷 만화의 콘티를 비춘다. 그 콘티는 《mono》 자신의 처음 몇 장면을 지시한다. 그 콘티에 대한 “은근슬쩍 고양이를 끼워 넣었지만요”라는 편집자의 츳코미는 그 다음 장면으로 교묘하게 연결되는데, 사츠키가 바로 그 고양이인 대장을 길거리에서 발견해 360도 카메라로 촬영하는 장면이다. 결국 《mono》 1화는 그 엔딩에서, 《mono》를 연재하기까지의 작가 하루노 자신의 이야기와 ‘하루노가 그린’ 사츠키와 안의 키라라적 이야기로 역전된다. 게다가 이 역전은 매 화마다 반복된다. 첫 화와 마지막 화를 제외하면, 매 엔딩의 마지막 쇼트는 그 화 속 한 장면이 그려진 만화 콘티이기 때문이다. 《mono》의 엔딩은 ‘스킵할 수 없는’ 연풍적 엔딩이다.

이어지는 2화에서 《mono》는 그 스스로를 비평한다. ‘사진으로 보는 풍경과 실제로 보는 풍경은 다르구나’, ‘실제로 그곳에 가보고 싶어지는 만화. 응, 좋은걸!’라는 하루노의 생각은 그녀가 그리는 만화인 《mono》를 향해 있다. 그리고 6화, 7백 곳의 도조신이 기록된 뭉우리돌 도조신 찾기의 전용 앱에 감탄하며 사츠키는 “차라리 운영진을 취재하는 편이 더 재밌는 만화가 되지 않을까요”라고 자조한다. 그러나 그 자체로 이미 드러나 있듯, 하루노는 운영진이 아닌 사츠키 일행의 성공적이지만은 않은 도조신 찾기를 만화로 그렸다. 아니, 오히려 운영진을 취재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하루노는 자신과 자신이 본 사츠키 일행을 스스로 언급하는 만화를 그리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들 자기지시가 《mono》를 에세이 만화로 만든다. “더 재밌”어지기는 에세이 만화의 목표가 아니어서, 이 의미에서 《mono》는 스스로를 비평한 것이다. 《mono》의 자기지시는 동시에, 원칙적으로, 꾸며진 인물의 꾸며진 에세이 만화일 수도 없게 한다. 물론 자기지시적인 메타텍스트는 이미 적어도 20세기 후반에는 활발히 창작되어 비평의 대상이 되어왔다. 다만, 《mono》 읽기는 《mono》가 여전히 망가타임키라라의 일상계 만화/애니임에서 시작해야 한다.

《mono》가 에세이 만화라는 점에서 《mono》의 모든 이야기는 과거적이다. 《mono》 1화의 첫 장면은 그 엔딩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려지기 시작했다. 나아가 《mono》의 모든 이야기는 사츠키와 안의 경험 이후에 하루노의 각색을 통해 ‘이미’ 그려져 있는 과거의 일이다. “이야, 애니화된 작가님들이 나눌 법한 대화구나 하고 생각해서.” 하루노의 《mono》는 ― 당연하게도 ― 《mono》 7화의 시점에서는 아직 애니화가 되지 않았다. 한편, 수많은 텔레비전의 연속극은 존 피스크의 『텔레비전 문화』에서의 표현처럼, “미결의 상태로 계속 진행중인 이야기”이며 “쓰여지지 않은 텍스트와 함께 가는 미래의 느낌”을 주려고 한다. “연속극은 그 형식적 구조가 구술문화의 현장성과 현재성, 미기록성을 대표하기 때문에 아주 손쉽게 일상생활의 일부가 된다” (존 피스크, 1987/2017). 그러나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연속극으로서의 《mono》는 자기 자신이 과거의 일이라는 표지를 가장 첫 화에서부터 매 화마다 전면에 내세운다.

《mono》는 텔레비전 연속극의 현재성을 포기함과 함께, 오히려 그 현재성을 포기했기 때문에, 무시간성을 갖지 않는다. “우리 쪽에 연재 중인 야마나시가 무대인 캠프 만화가 내년 봄에 애니화 하는데요, 다음 화는 그 배경지 탐방을 겸한 이야기로 해보는 건 어떨까요?” 하루노는 호분샤에서 연재하는 《mono》의 작가이므로 이 캠프 만화는 《유루캠△》을 지시할 수밖에 없다. 《mono》의 세계는 《유루캠△》이 만화로서 있는 세계다. 에세이 만화로서의 《mono》는 현실을 제 속에 ‘현시’한다. 《mono》가 ‘과거적’이라는 의미는 오히려 《mono》의 일들이 우리 세계의 시간축 어딘가에 정말로 새겨져 있음이다. 반대로, 일상계의 무시간성은 추가적인 시간축을 전제한다. 일상계의 주인공들은 다른 시간축 어딘가에 ‘살아가고 있’고, 독자들이 그 작품을 펼칠/켤 때마다 그 시간축의 영점과 규모가 새롭게 맞춰지는 일이 무시간성이다. 《mono》는 단순히 우리 세계의 과거를 그린다는 표지를 포함함으로써 일상계의 무시간성을 우회한다. 《mono》의 시간성은 사진의 시간성이다. 돌아오지 않을 과거를 박제해 독자가 그 과거를 계속해서 마주할 수 있게 하는.

그런 의미에서 《mono》는 대지를 향해 살아나’갔던’ 느낌이고, 또 그런 의미에서 《mono》는 ‘우리 세계를 찍은’ 다큐멘터리이다. 그러므로 다음의 두 절은 이 절과 병렬적으로 읽혀야 한다.

하나의 보조선 ― 빔 벤더스, 《도쿄가》(1985)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도쿄에 있었다는 건 안다. 83년 봄이었다는 것도 안다. 그건 안다. 나는 카메라와 함께했고, 영상을 찍었다. 이 이미지들이 지금 존재하고, 이들이 내 기억이 되었다. 하지만 생각은 안 난다. 만일 카메라가 없었더라면, 나는 지금 더 잘 기억할 수 있었으리라.”
《도쿄가》(1985)는 빔 벤더스의 이 독백으로부터 시작된다. 남수영이 2009년에 『이미지 시대의 역사 기억』에서 이 독백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고 썼을 때, 10년 만에 모두가 자신의 일상을 작은 카메라와 함께하고, 사진을 찍으며 살아가는 미래가 올 줄은 미처 몰랐으리라. 이제 우리 모두는 빔 벤더스의 이 독백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일상적으로 우리의 눈은 스마트폰 카메라로 종종 대체되고, 관광지에서는 어떻게 하면 더 잘 기억할 수 있을지보다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사진을 찍을 수 있을지를 모두가 고민한다. 1983년에 벤더스가 느꼈던 문제는 이젠 모두의 문제가 된 것일까.

《도쿄가》는 또한 《동경 이야기》(1953)의 첫 장면으로 시작된다. 벤더스는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영화들을 신성한 영화의 보고로 꼽으며, 오즈의 작품들 속에 비춰진 도쿄의 이미지가 여전한지 아닌지를 확인하러 도쿄행 비행기에 올랐다. 오즈의 영화의 몇몇 순간들 ─ 배경 속 한 아이의 몸짓, 프레임을 가로지르는 새의 비상, 화면에 비친 구름의 그림자 ─ 을 ‘진실의 순간’이라며 찬양하는 그는, 오즈의 영화 속에서 느껴졌던 친근한 도쿄의 이미지를 찾고자 했다. 지하철 역에서, 벤더스는 엄마 손에 질질 끌려가는 한 아이를 본다. 그는 이 아이에게서 오즈 영화 속에 자주 등장하는 반항적인 아이들을 떠올렸다. 혹은, 그의 표현을 빌리면, 그들을 떠올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다시 “어쩌면 내가 찾는 것은 이제 이곳에 없다”고 고백한다. 도쿄는 변해버렸고, 아마도 1950년대의 도쿄는 더 이상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벤더스는 자신이 발견한 사람과 장소들 ― 고집 센 아이, 골프장, 50mm로 본 신주쿠의 골목, 그리고 기차 ― 에게서 오즈의 도쿄를 본다. 그는 그 이미지들에게서 기이한 친근함을 느낀다. 오즈의 영화들로부터 온 이들 친밀감은 벤더스의 시각을 방해한다. 혹은 더 나은 표현으로는, “우리는 선입견을 가지고 텍스트를 읽고 선입견이 우리의 선이해를 규정한다” (한스-게오르크 가다머, 1960/2012).

“오직 있는 것만이 있으며, 그것이 실재이고 현실이다. 이 개념만큼 영화에 적용했을 때 공허하고 무익한 관념도 없다. 사람은 저마다 스스로 ‘현실 인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 사람은 저마다 그의 눈으로 그의 현실을 본다. (…) 그리고 사람은 저마다 스스로 개인적인 경험과, 스크린 위에 그려지는 그 경험의 묘사 사이의 흔한 극심한 간극을 알고 있다. 영화와 삶을 분리하는 그 거대한 거리를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도록 배워왔기에, 우리는 영화 속에서 무언가 진짜인 것을 문득 발견할 때면 — 그것이 배경에 있는 아이의 몸짓이나, 화면을 가로지르는 새, 혹은 아주 잠깐 장면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구름에 불과할지라도 — 숨을 멈추고 깜짝 놀란다.”
벤더스는 오즈의 영화를 경유해 진실에 대한 회의를 말한다. 그는 도쿄 대신 카메라를 통한 도쿄를 보았고, 《도쿄가》가 그의 기억이 되었다. 벤더스의 도쿄는 1983년 봄의 도쿄도 아니고 오즈의 진실한 도쿄도 아니다. 벤더스는 오즈의 진실한 이미지들을 안고 도쿄에 왔지만 그가 본 도쿄는 공허해 보이는 이미지가 가득했다. 포즈에 집착하며 골프를 치는 사람들과 가짜 음식 모형들. 하지만 벤더스는 그들을 보고 싶다고 말한다. 《도쿄가》는 진실한 오즈의 이미지와 공허해 보이는 이미지를 병치한다. 이 병치는 “경험과, 스크린 위에 그려지는 그 경험의 묘사 사이의 극심한 간극”을 그린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벤더스의 도쿄는 벤더스 자기 자신의 진실한 현실이다. 다큐멘터리는 그의 첫 독백처럼 허구적이지만, 동시에 진실하다.

이제 《도쿄가》를 보조선으로 삼아 《mono》를 읽어보자.

《mono》의 카메라는 양가적이다, 혹은 《mono》의 주제

신학기, 선배들이 졸업하고 신입 부원도 없는 사진부와 영화연구부는 ‘우연히’ 동시에 폐부 위기에 처했다. 그리고 ‘우연히’ 영화연구부의 부장은 사츠키와 같은 반이었던 시키시마 씨였고, 시키시마 씨는 ‘우연히’ 쿨했다. 사진부와 영화연구부가 합쳐진 동아리인 시네포토부는 여러 우연이 겹쳐져 만들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사진부와 영화연구부는 우연이 없으면 합쳐질 수 없다. 사진과 영화의 공통점은 카메라를 사용하는 예술이라는 점 이외에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시네포토부는 사진부이기도 하고 영화연구부이기도 하니까”
“그렇네”
“근데 조금씩 동영상도 찍지 않았었나?”
“이번에는 동영상이 아니고 영화야”
“하긴 그것도 그런가”
11화의 B파트는 여름방학의 끝을 맞이한 주인공들이 다음 학기에는 영화를 찍기로 결심하는 대화로 끝난다. 안의 “조금씩 동영상도 찍지 않았었”냐는 의문에 대해 사츠키는 동영상과 영화가 다르다고 답한다. 안의 의문처럼 동영상과 영화는 모두 현실과 닮아 현실을 지시한다는 의미에서 도상적이다. 그렇지만, 사츠키의 지적대로 동영상은 사진적이지만 영화는 그렇지 않다. 《도쿄가》의 독백, 우리 모두는 이미 현실과 스크린 위 영화 사이의 간극을 알고 있다. 반면 사진은 그 사진이 비추는 이미지가 과거에 정말로 존재했었다는 지표성을 그 자체로, 매체 수준에서 가지고 있다. 시청자는 사츠키 일행이 찍은 ‘바로 그’ 사진을 본다. 그러므로 시청자와 주인공들은 같은 현실을 공유할 수 있다.

이 현실적인 (스틸) 사진보다 더 현실적인 것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360도 파노라마 사진과 스트리트 뷰다. 360도 사진과 스트리트 뷰는 마치 게임처럼 우리의 행위를 필요로 한다. 안이 360도 사진을 두고 “만져보는 편이 더 재미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 행위성은 지표적인데, 그들이 사진과 같이 과거 모습의 도상이자 대상들이 현실에 있었다는 증거이면서, 나아가 현실에서 시선의 회전이 경관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그리고 어떤 길을 운전하거나 걸을 수 있는지에 의해 결정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차라리 고개 돌리기와 산책을 장르로 하는, 사진적 샌드박스 게임이라고 부르는 건 어떨까? 현실이 이미 샌드박스 게임이기 때문에, 혹은 이들이 시공간과 단위 구 위의 함수인 현실 풍경을 더 ‘덜 제한’하기 때문에, 이들은 현실적이다.

하지만 여태 그러모은 모든 현실성에도 불구하고, 뭉우리돌 도조신 찾기 대회를 위한 버추얼 산책은 부분적으로만 성공했을 뿐이다. 스트리트 뷰로 들어갈 수 없었던 좁은 골목길, 옆에서 봤을 때는 둥글지 않았던 도조신, 안이 도조신을 찾은 곳은 스트리트 뷰가 아닌, 대장이 날린 오이를 맞고 떠올린 기억 속이었다. 급기야 하루노의 할머니는 몇 마디의 말로 스트리트 뷰와 인터넷을 통해 얻은 모든 정보를 무력화했다. “그러고 보니 집 뒤에 있는 뭉우리돌신은 어땠니?” “옛날부터 있었잖아.” 그 잊힌 뭉우리돌신이 하루노를 대회에서 2등에 들게 했다.

또는

3화는 스트리트 뷰를 통해 후지산의 경치, 쿠로베 댐, 슈퍼 카미오칸데, 그리고 수도권 외곽 방수로를 본다는 도전과제를 달성하며 시작된다. 그리고 사츠키의 불평, “에이, 자기가 찍는 게 좋은 거잖아.”

《도쿄가》의 첫 독백처럼, 사진은 우리의 ‘진실한 기억’일 수 있었던 어떤 것을 대체한다. 경험이 기록된 이미지는 그 경험이 그 이미지와 같았으리라는 착각을 만든다. 사진은 “추억을 차단하고, 곧 하나의 ‘반추억’이 된다” (롤랑 바르트, 1980/1986). 혹은 역사가 그러한 방식으로 쓰여진다. 이는 동시대의 모두가 경험하는 현상이고, 《mono》의 한 주제는 바로 이 보편성이다. 《mono》의 주인공들이 사진을 찍는 여러 순간들은 특권화된 순간이 아니다. 《mono》의 사진 찍기는 일상 속에 이미 녹아 있다. 사츠키의 비타는 셔터음 답지 않은 셔터음을 울리고, 달리는 차 안에서의 도조신 촬영은 사진을 위한 사진 찍기가 아니다. 아마도 《mono》의 주인공들은 《타마유라》 시리즈의 폿테 부장보다 더 많은 사진을 습관적으로 찍었을 테지만, 이들은 시청자들이 눈치챌 수 없는 방식으로, 익명적으로 숨겨져 있다. 아울러 《mono》는 이 보편적 습관이 정지하는 시간을 놓치지 않으면서 사진을 비평한다. 하치부세산 전망대의 옆에서 사츠키는 다음 장소로 가지 못하고, 카메라를 들지 못하고…. “하루씨, 조금만, 조금만 더 바라봐도 될까요?” 사츠키의 오른쪽 눈을 비추는 익스트림 클로즈업은 화면 바깥을 향하는 사츠키의 응시 자체를 포착한다…. “그렇네”, 이어지는 7초. 그저 흩날리는 머리카락. 주인공들은 움직임도 사고도 끊어진 채로 그저 눈 앞에 놓여있을 경치를 바라본다. 우리는 그곳에 흐르는 시간을 직접 경험한다. 내러티브 사이에 삽입된 이 순수한 시간의 이미지1는, 사진도 360도 사진도 동영상과 다큐멘터리도 재현할 수 없는 현실의, 무한함의 상징이자, 성지 순례의 원동력이다.

그러니 사진, 동영상, 다큐멘터리는 얼마간 허구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비난이면서 동시에 비난이 아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오즈의 영화처럼, 벤더스의 《도쿄가》처럼, 진실한 사진과 동영상과 다큐멘터리는 역사를 가슴 뛰게 하고 현재를 사는 우리의 태도를 바꾸는 역량을 갖기 때문이다.

“공사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극중극 다큐멘터리 《프로젝트 WY: 쿠로베 댐 ∼사나이들의 도전∼》의 나레이터는 사나이들이 고군분투하는 모습 위로 이렇게 말한다. 이 장면은 사나이들이 덤덤한 표정으로 의논하는 앞선 장면으로부터 연결되고 있다. 이 연결은 나레이터가 마치 사나이들의 상상에 대해 서술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다른 말로, 이 짧은 다큐멘터리조차 자유간접화법을 사용한다. 콘크리트 운반용 버킷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안, 댐 위를 걷는 등산객들을 보며 사나이들을 생각하는 사쿠라코, 기대했던 댐 카레를 한 숟가락도 뜨지 못하는 하루노. 다큐멘터리의 자유간접화법이 ‘그린’ 댐의 과거는 주인공들의 태도를 바꿨다. 다큐멘터리로서의 《mono》는 스스로 다큐멘터리의 역량을 인정한다. 《프로젝트 WY》는 그러므로 진실한 다큐멘터리다. 한편 이 모든 일이 3화의 스트리트 뷰로는 불가능했음은 명확해 보인다. 이런 의미에서 아무런 고려 없이 촬영’된’ 스트리트 뷰는 대개 현실의 제한일 ‘뿐’이지만, 다큐멘터리는 현실의 제한이면서 종종 어떤 새로움을 동반한다. 반복하고 싶은 말: 《mono》는 다큐멘터리다.

《mono》, 12화.

《mono》의 카메라는 양가적이다. 시네포토부 부실에 놓인 4개의 실내화, 시네포토부는 유령 부원이던 긴 주황 머리에 마이페이스인 타지마 씨를 불러 야심차게 POV 호러, 호러 모큐멘터리 영화 촬영을 결심한다. 시네포토부 부실에 놓인 3개의 실내화, 타지마 씨는 먼저 돌아가 버렸지만. 후카시로 댐 위에서, 영화를 찍는 일련의 장면들은 타지마 씨를 제외한 사츠키 일행의 나레이션과 함께하는 영화-촬영-‘다큐멘터리’로부터 시작한다. 이 다큐멘터리는 곧 도조신 모형 앞에서 ‘영화’가 되었다가, 타지마 씨가 합의와 다르게 호수 방향으로 달려간 후, 넋을 잃은 사츠키와 안을 보여주는 롱 쇼트에 첨벙 소리가 겹치자 다시 ‘다큐멘터리’가 되었다. “미안, 나 급한 일이 생각나서 이대로 버스로 돌아갈게.” 하지만 그 후로 주인공들이 타지마 씨를 학교에서 보는 일은 없었습니다. 타지마 씨는 검은 단발 머리의 수수한 아이였습니다. “그럼 우리랑 같이 동영상 찍었던 그 사람은 대체….” 시네포토부 부실에 놓인 $3+1/2$개의 실내화, 살아있는 세 실내화가 반투명하고 비물질적인 타지마 씨의 실내화와 병치된다. 이중 노출. “우리가 알고 있던 유령 부원 타지마 씨는 정말로 유령인 것처럼 갑자기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 소란은 사쿠라코와 타지마 씨(가짜)를 연기한 영화연구부 OG 이노마타가 꾸민 몰래카메라였고, 이 고백과 동시에 그 모든 장면들은 다시 ‘영화’가 되었다. 결국 주인공들이 찍은 영상은 영화였을까, 다큐멘터리였을까? 아마 그 정답을 둘 중 하나로 선택하는 짓은 빛이 입자와 파동 중 어느 하나라고 말하는 짓과 같을 테다. 이 질문이 아무런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 오즈의 영화와 《도쿄가》는 영화에도 다큐멘터리에도 상대방의 성질이 들어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질문에 답하는 일을 유보해야만 한다. 아니면, 그 상을 시네포토라고 부르거나.

시네포토로서의 《mono》

그 시네포토를 관통하고 허구를 폭로하는 것은 사쿠라코가 내뱉은 타지마 씨에 대한 모순된 설명이다. 다큐멘터리로서의 《mono》에도 그러한 것이 있다. 그것은 작화다.

《mono》, 3화.

《mono》의 다큐멘터리적인 진실함을 매개하는 하나의 매체는 작화다. 예를 들어 3화의 연속된 두 쇼트에서 그려진, 하루노의 막과자 가게에서 어떤 사진을 찍을지 의논하는 주인공들의 뒤를 찌르는 방향으로 과자를 훔치는 한 장난스러운 아이. 액션캠이 피사체인 스케이트 보드를 타는 안을 추월하거나 수풀과 아스팔트를 비추는 일. 파노라마 리프트를 타며 360도 촬영을 하는 사츠키 일행의 뒤로 지나가는 흔들리는 나무들. 야마나시 빙수 순례길을 걷는 주인공들의 움직임이 반사되는 신기루. 이들 작화는 빔 벤더스가 오즈의 영화에서 발견했던 그 진실의 순간들처럼 보인다. 당연하다. 인간의 눈은 오히려 운동을 보고, 애니메이션의 쇼트 하나하나에는 움직임이 적다. 때문에 이들은 자신의 쇼트의 주인공이다. 그들의 움직임은 시각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던 주변부의 기억을 촉발하는 방아쇠이고, 그런 기억들만큼 진실할 수는 없을 테니.

X, @mono_weekend.

한편으로 《mono》의 작화는 작가주의적이다. 《mono》는 일상계 작화애니의 흐름 속에 있다. 이를 모두가 당연하게 감지할 수 있는 건, 《mono》 공식 X 계정에 의해서이기도 하다. 요는, 《mono》 공식 X에서 스크롤을 내리다보면 우리는, 제작에 관여한 사람들이 올린 소감과 축전의 재게시들, 무엇보다 소와네가 올린 원화와 그 원화를 그린 애니메이터의 이름을 목격한다2. 원화는 운동의 혹은 애니메이션의 설계도로서, 몇 가지 상징적인 색으로 칠해진 밑그림과, 한 운동에서의 배치를 나타내는 번호를 포함한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원화에서 애니메이션의 바깥, 애니메이션 ‘제작’에 관련된 상징들을 본다. 또, 원화에는 화면 바깥이 그려져 있어서, 우리는 원화에 그려진 상들이 그 세계의 전부라고 느낀다. 원화의 바깥에는 원화가의 이름이 있다. 애니메이션과 그 끝의 사이에는 엔딩 크레딧이 있다. 만화 《mono》의 표지에는 아f로의 이름이 있다. 바로 이 곳에서 《mono》는 누군가에 의해 창작되었음이 폭로된다. 《mono》의 작화가 이젠, 애니메이션과 그 끝의 사이에서 《mono》의 다큐멘터리적인 힘을 약화시킨다. 다큐멘터리에 구멍을 낸다. 스케이트 보드를 타는 안과 그 주변부 대신 타카하시 유이치의 이름을 드러내면서.

그러므로 우리는 《mono》를 시네포토라고 불러야 하겠다.

《mono》의 유령들

이와 다른 맥락에서 《mono》를 시네포토로 만드는 또 다른 요인은 유령이다. 이 문장은 동어반복처럼 들린다….

애니메이션 《mono》에는 모두 세 유령이 있다: (1) 야샤진 고개에서 하루노에게 붙은 여자 아이의 유령, (2) 쿠로쿠마의 어시스턴트, (3) 나나마가리의 한 그루 소나무 앞에서 조우한 쿠로쿠마. 그 외에는 주인공들이 본 헛것이다. 그러나 시청자들이 이들을 지루하게 느끼는 건, 무엇보다 이들 유령이 타지마 씨의 실내화처럼 이중 노출로 찍혔기 때문이다. 즉, 유령이 ‘실제로’ 있으나 없으나 주인공들의 경로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 예컨대 주인공들은 영상 속에서만 여자 아이의 유령을 보지만, 유령이 실재하지 않더라도 어떤 영상에서는 유령 ‘같아 보이는’ 것이 보일 수야 있다. 이 이중 노출은 《mono》가 하루노에 의해 얼마간 각색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정확히 심령 사진을 만드는 방법이다. 《mono》는 심령 사진이고, 심령 사진은 이미 시네포토다.

다큐멘터리로서의 《mono》는 애니메이션일 뿐인 심령 사진이다. 심령 사진은 분명히 언캐니하지만, 그보다 먼저 사진이 이미 언캐니하다. 유운성이 『식물성의 유혹』에서 롤랑 바르트를 따라 “보도사진처럼 기능적으로 사실성에 집착하는 사진의 인물일수록 들여다보면 볼수록 온갖 이야기를 감춘 것처럼 보이고, 광고사진처럼 기능적으로 허구성에 집착하는 사진의 인물일수록 관람자 앞에 그의 얼굴과 몸에 달라붙은 사실적 특징들을 무방비로 노출해 버리고 만다”고 적은 것처럼. 심령 사진은 그저 그 언캐니함을 중심에 내놓았을 뿐이다. 이는 강한 지표성을 기꺼이 포기하면서 언캐니함을 통해 유령에 대한 지표적 증거를 제시하는 ‘인상’을 주기 위함이다. 《mono》는 무엇을 위해 심령 사진이 되었을까? 아니면 반대로 《mono》에서 유령은 제거되었어야 했을까.

《mono》의 유령을 이중 노출이라고 급히 칭했지만, 실은 이중 노출의 상과 《mono》의 유령은 심대한 차이가 있다: 이들 유령은 불투명하다. 내지는, 《mono》의 작가는 유령을 몸을 가진 현실의 존재자로서 그린다. 또 달리 말하면, 주인공들과 유령들을 같은 존재론적 지위에 둔다.

유령에 대한 시청자들의 뜨뜻미지근한 반응처럼, 유령이 있다는 걸 진지하게 믿는 현대인은 멸종위기종이다. 동일한 맥락에서, 《mono》와 《유루캠△》의 주인공들이 정말로 야마나시에 살고 있다고 진지하게 믿는 오타쿠는 없지 않을까. 하지만 오타쿠들은 그들의 존재를 믿지 않으면서도 마치 그들이 있었던 것처럼 그들의 경로를 따라다닌다. 오타쿠들은 그들의 경로를 성공적으로 재현해내 기록한 이들을 부러워하며 개추와 실베추를 부여한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 이데올로기, 여러 이름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 유령이지 않은가?

《mono》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mono》는 스스로 그 주인공들을 유령으로 이곳에 정말로 현현시킨다. 주인공들을 ― 적어도 그들의 모델들을 ― 여기에 있게 하는 자기언급과, 엔딩 크레딧(ⓒあfろ/芳文社・アニプレックス・ソワネ)은 모순되므로 어느 하나를 조건 없이 믿을 수 없다. 곧, 우리는 사츠키와 안이 하루노에게 붙은 유령을 액션캠 영상 속에서 발견하는 것처럼 다큐멘터리인 《mono》 속에서 주인공들을 발견한다. 이는 또한 《유루캠△》의 주인공들이 서브리미널적으로 삽입된 이유이자 《mono》가 심령 사진이기를 자처한 이유다. 그들의 유령을 만나러 갈 이들을 위해서 《mono》는 야마나시에 유령들을 풀어놓는 장난을 쳤다.

여자 아이 유령은 하루노가 “생전에 기르던 새와 닮아서 반가운 마음에 붙어 왔”다. 그녀를 떼어내기 위해, 하루노는 쿠로쿠마의 조언대로 버스를 타고 야샤진 고개의 터널을 통과하며 “산 속에서 분명 외로우셨죠, 앞으로 가끔 놀러 오도록 할테니까요, 이번에는 부디…“라고 마음 속으로 읊조린다. 터널을 통과하는 하루노, “또 만나”, 그리고 시점이 상승하며 점점 작아지는 버스를 비추는 일련의 부감 쇼트들. 마치 그녀가 성불한 것처럼…. 작지만 심원한, 장난스러운 반전: 돌아오는 길, 하루노가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터널을 통과하자마자 그 유령은 다시 들러붙어있었다. 하루노가 다시 터널을 지난다면 언제라도 그녀는 다시 들러붙을 것이다. 《mono》의 유령들도.

‘일상계’의 다큐멘터리, 메타-일상계를 위한 시론

앞서 《mono》를 다큐멘터리라고 성급히 선언했지만 여기에서 멈춰서는 안 된다. 그 당연한 사실보다 더 강하게, 《mono》가 다큐멘터리라면 무슨 다큐멘터리인지 물어야만 한다.

사진의 여러 이론들은, 사진에 “애수가 깃들어 있”다고 쓴 수전 손택을 포함해서 (수전 손택, 1977/2005), 사진이 부재의 징표임을 강조한다. 《mono》의 시작, 마키노하라 선배의 졸업에 쓸쓸함을 느끼는 사츠키의 모습과, 2화, 더 나은 공중 촬영을 찍고자 논의하는 사츠키와 안을 보며 떠나가버린 영화연구부 선배들을 떠올리는 사쿠라코의 모습은 이에 호응하는 듯하다. 《타마유라》와 마찬가지로 《mono》가 부재의 쓸쓸함에서 시작함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타마유라》와는 다르게, 마키노하라 선배의 부재는 첫 두 화를 지나면 마지막 화 이전까지 명시적으로 비춰지지 않는다. 마키노하라 선배는, 3화에서 사츠키가 휴대전화로 시간을 확인하는 장면에서 잠금화면으로서, 그것도 일상적인 쇼트들 사이에 끼어 짧게만 등장할 뿐이다. 《mono》는 사진이 아니고, 무엇보다도 사진 찍기를 포함할 뿐인 애니메이션이다. 요컨대 《mono》의 사진은, 첫 화와 마지막 화를 제외하면, 사진’찍기’이고, 따라서 현재 시제다. 시청자들이 보는 것은 사진이 아니라 오히려 사진을 찍는 그 순간에 카메라에 사영된 상들이다.

《mono》의 사진은 마키노하라 선배와 재회하는 마지막 장면에서만 과거 시제다. 하지만 이 재회는 선배의 졸업 이전으로, 최초의 장면으로 돌아감이 아니다. 마키노하라 선배에게 공유한 사진들에 이어지는 사츠키의 말: “(…) 사진도 동영상도 많이, 많이 찍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요, 지금, 굉장히 즐거워요!” 이와 함께하는 영상은 과거의 일들을 상기시키는 사진이 아니라, 360도 촬영을 하려는 사츠키의 카메라에 맺히고 있는 움직이는 상이다. “다양한 걸 찍고 싶어요!” 《mono》의 시제는 현재다. 사츠키가 과거의 사진들을 바라보면서도, 애수를 느끼는 대신, 단지 그 사진에 표상되어 있으면서도 현재까지 지속되는 상태를 말할 뿐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mono》는 부재의 쓸쓸함에서 시작했을지라도 존재의 즐거움 ― 모든 일상계는 이를 그리고자 하는 것 같다 ― 으로 끝난다. 그러므로 《mono》를 일상계의 다큐멘터리라고 부르자. 일상계와 다큐멘터리의 이 시제적 이중성은, 시네포토=유령이라는 《mono》의 축과 공명하고 있다.

히로세 마사히로가 「’공기계’라는 이름의 감옥: 아니메 《케이온!》과 성을 둘러싼 상상력」(2013)에서 《케이온!》이 ‘공기계’가 아님을 역설하며 지적했듯, 일상계는 갈등과 시간이 거세된 여자 아이들의 ‘낙원’같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일상계는 새로운 형태의 성장을 그려보는 시도다. 이 성장은 ― 너무나도 일본적인 단어인 ― 모라토리엄으로부터 탈출했다/하겠다는 종래의 소년만화스러운 선언이 아니라, 일상이라는 거대한 외연을 가진 단일한 단어로 병합되지만 실은 그 무엇으로도 환원되지 못할 기억과 경험들, 내지는 사랑과 우정들 속에 은밀히 숨어 있는 미시적 나아감이다. 《타마유라》에서: “변함없는 매일 속에서 아주 조금씩 무언가가 변해간다. 지나가버린 시간은 되돌릴 수 없지만, 바로 그렇기에 소중하고 잊고 싶지 않아서, 가슴 속에 추억으로 담아놓는다.” 그 덕분에 마지막 화에서 첫 화의 주인공들의 모습을 돌아보면, 그들의 각성이나 통과의례가 큰 갈등을 통해 가시화되어 그려지지 않았음에도, 어떠한 성장의 느낌을 감지할 수 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수많은 에피소드를 뚫고 그 끝에 있는 과거를 다시 보게 하는 이 자동기계가 일상계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노스텔지어를 만들어내는 배후가 아닐까. 하지만 바로 이 특유의 이야기 전달 방식이, 마지막 화를 본 오타쿠로 하여금 다시 첫 화로 향하게 하는, 빠져나오기 힘든, 닫힌 원환의 구조를 만든다. 덕분에 일상계는 많은 빈축 ― 무시간성이라는 오명을 포함해 ― 을 샀다.

하지만 ‘재정주행’이라는 현상을 명시적으로 막는 메타적인 이야기는 그 너머를 상상하게 해 준다. 《학원 유토피아 마나비 스트레이트!》의 마지막에서 낭만적이었던 세이오 학원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미캉을 제지하고 격려하는 82대 학생회의 친구들, 나나가 만들어 낸 99회 스타라이트의 닫힌 반복을 끊어내는 《소녀☆가극 레뷰 스타라이트》 등등. 그리고 이제는 《mono》도. 《mono》는 결국 무엇을 남겼던가. 장난과 유령들, 쓸쓸함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의지, 어떠한 의미로는 미시적 반항이라고 불릴만한 일상 속의 작은 기예들 ― 성지 순례를 통해 전승될.

마키노하라 선배의 사진을 휴대전화의 잠금화면으로 설정해 둔 사츠키처럼 우리는 《mono》를 휴대전화의 배경화면으로 간직하겠지만, 또, 《mono》의 유령을 찾으려 그들의 경로를 따라 야마나시를 배회하고, SSR 하루노를 뽑기 위해 중고 거래를 하겠지만, 《mono》가 그랬듯 첫 화의 쓸쓸함으로는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 사츠키가 마키노하라 선배를 화면 넘어로 우연히 다시 만난 것처럼, 우리는 《mono》를 언젠가 우연히 다시 만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오직 유루하게만 메타적인 《mono》를 따라, 이렇게 말한다: “선배가 졸업하고 나서 침울해지기도 했었는데요, 키리야마도 있는데다가, 새 카메라를 샀더니 하루 씨와도 알게 되었고, 사쿠라코의 영연과 합병해 시네포토부가 됐어요. 하루 씨의 친구나 업계 동료와도 알게 됐고요. 하루 씨가 그린 만화의 모델이 된 일도 있어서, 사진도 동영상도 많이, 많이 찍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요, 지금, 굉장히 즐거워요!”

  1. 이들 직접적인 시간의 이미지는 특별한 게 아니라 일상계 애니메이션의 일반적인 이미지다. 예를 들어 《논논비요리》 4화에서 머리가 하얘진 렌게의 얼굴을 말 없이 비출 뿐인 50초 동안의 클로즈업. 

  2. 쿠츠나 켄이치가 어딘가에서 제안한 작오타-작화오타쿠-작화매니아의 분류처럼, 작오타라는 현상은 SNS가 없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